메뉴 건너뛰기

연세 YWAM 계좌번호 : 신한은행 110-293-670952 이미나

위대함의 척도 (행1장)

joy 2002.09.12 03:54 조회 수 : 1649

2002년 9월 12일 목요일  연대 캠퍼스 모임 설교
사도행전 1장  강해
제목 : 위대함의 척도

모든 사람 안에는 탁월함을 향한 갈망이 있다. 위대한 인생을 향한 꿈이 있다.  우리의 앞서간 위대한 믿음의 선진들 중에 여러분이 닮고 싶고 배우고 싶은 한 사람을 들라하면, 누구의 이름을 들 수 있겠는가?    당신이 그 사람을 위대하다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으로 일컬어지며, 요셉은 꿈의 사람으로 불리우고, 모세는 온땅에서 그 온유함이 가장 승한 자였다고 성경이 증언하며,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위대한 왕이었고, 엘리야는 능력의 선지자였으며, 다니엘은 신앙의 절개와 중보기도의 사람이었다.
아마 우리 중 거의 모든 사람은 이러한 사람들처럼 내 인생을 뭔가 의미있는 일에 드리고 싶고, 누군가에게 아주 중요한 사람이고 되어주고 싶고, 내가 살아있는 동안이건 죽은 이후 이건 다른 사람에게 좋은 영향력을 남기는 사람이고 싶은 소망이 있을 것이다.     세상에서 유명한 자가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하나님 나라에 그 이름을 남길만한, 따라갈 만한 믿음의 족적을 남길 수 있는 인생을 살고 싶은 소원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윌리엄 케리가 남긴 명언, “하나님께로부터 위대한 것을 기대하라.  하나님을 위하여 위대한 일을 시도하라.”는 말처럼, 우리 모두에게는 위대함에 대한 갈망과 소원이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위대한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인가?   우리의 인생은 어떻게 위대한 인생의 족적을 남길 수있는가?    
여러 가지 기준이 위대함의 척도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지적인 통찰력, 방대한 저술, 탁월한 감성, 범접할 수 없는 카리스마, 놀라운 기름부으심, 다듬어진 성품, 뛰어난 웅변술, 외형적인 일들의 성과, 사람들의 인지도, 그리고 때로는 그 사람이 타고 다니는 자동차나 출석 교인 수 ....등등
그러나 이런 시대의 흐름을 따라 요동하는 기준이 아니라, 변치 않는 기준이 있다.  모든 시대의 역사를 통틀어 변치 않는 위대함의 척도가 되는 것이 있다.  그것이 무엇인줄 아는가?   그것은 그 사람의 “기도생활”이다.
<셀 지도록 혁명>에서 레오나드 라벤힐은 “누구도 자신의 기도생활보다 더 위대해지지 못한다.”라고 말했다.  
한 사람의 위대함을 결정하는데 있어서 ‘그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충분한 시간을 보내는가?’는 아주 중요한 기준이다.  또한 중요한 것은 ‘그 시간이 얼마나 깊이 있게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머무는 시간들이 될 것 것인가?’이다.  
해야 할 수많은 일들, 배우고 읽어야할 수많은 것들, 만나야 할 수많은 사람들, 즐길 수 있는 수많은 여흥들.... 그 속에서 기도할 시간들을 찾아내고 방해받지 않는 기도할 공간을 찾아낸다는 것은 참 쉽지 않은 일이다.

예수님은 부활 후 40일 동안 제자들과 함께 계시다가 승천하셨다. 예수님이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유언을 남기시고 그들에게 아주 중요한 사명을 부여하셨다.  어떤 사명들을 부여하셨는가?  복음전파, 부활증거, 제자삼기, 세례주기..등    그런데 이 모든 사명 보다 가장 먼저 제자들이 행하여야 할 일이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가?

행1:4]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5]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눅 24:49)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 하시니라』

그들에게 가장 먼저 부여한 사명은 ‘기다리는 것’이었다.  약속하신 성령이 오시기까지 기다리며 기도하는 것이었다.
그들에게 위임하신 부활의 증인이 되는 사명은 너무 중요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우선해야 할 것은 ‘기다리며 기도하는 것’이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그 부활하신 주님을 친히 목격하고, 예수님을 만난 사람이 몇이나 될까?  
고전15:4]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5]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6]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태반이나 살아 있고 어떤 이는 잠들었으며 [7]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8]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오백여 ‘형제’에게 라고 말씀하는 것을 보아서, 아마 이들은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중에 예수님과 보다 근접해서 있었던 제자들의 무리였던 것 같다.  12사도이외에 70인의 전도를 위해 파송된 제자들이 있었고, 또한 500명이 넘는 제자들의 무리가 예수님을 따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주님께서는 부활 후에 다시 그들에게 나타나셔서, 부활을 확인시켜 주시고, 왜 그리스도가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셔야 했는지를 말씀을 풀어 가르치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또한 그리스도의 부활의 증인이 되는 사명을 부여하신 것이다.

그런데, 행1장에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에 순종해서 ‘기다리기 위해, 기도하기 위해’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사람들은 몇 명이라고 말하는가?  [14] 여자들과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로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 [15] 모인 무리의 수가 한 일백이십 명이나 되더라
일백이십 명! 결코 적은 수는 아니다.   그러나, 일백이십 명 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나머지 380명!  이들은 어디로 간 것인가?   교회의 역사에서 사라져 버린 380명의 사람들, 예수님의 부활을 친히 목도하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왜 약속하신 성령이 임하시는 그 자리, 그 놀라운 영광과 축복의 자리에 함께 하지 못했을까?  모인 사람들이 급하고 강한 바람 소리를 들으며, 성령의 불길로 뒤덮여, 하늘의 새방언을 말하게 되는 그 자리에서 왜 그들은 제외되었을까?  

예수 믿으면 모든 사람이 구원받지만, 구원받은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광에 동일한 수준으로 참여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생명을 얻지만, 모든 사람들이 그 생명을 풍성하게 누리게 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부흥의 역사와 그 놀라운 축제에 많은 사람들이 초대를 받지만, 모든 사람들이 그 축제를 즐기고 그 즐거움에 참예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380 명의 사람들은 나중에 다시 교회 안으로 돌아왔을 수도 있지만, 그들은 평생 그 놀라운 영광의 자리에 함께 하지 못했음을 후회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그들은 거기에 없었을까?

첫째, 그들에겐 기다리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들이 너무 많았다.  
[6] 저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그들의 관심은 예수님의 관심과는 달랐다.  그들은 예수님의 방법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들은 가만히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다락방에 주저앉을 수 있을 만큼 여유롭지 못했다.  그들에겐 더 시급하고, 더 중요하고, 더 의미있는 일들이 너무 많았다.  “기도? 당연히 해야지.  충분히 중요하지.  하지만, 지금은 이 일이 더 급하고 중요해.”  하지만, 기억해야 한다.  기도 없이 하는 모든 일들은 하나님의 영광과는 관계없는 것이다.  기도 없이 쌓은 모든 업적들은 어느 순간에는 물거품처럼 사라지게 될 것이다.
몇 년 전부터 기도시간마다 자주 되풀이해오던 제목이 있다.  그것은 ‘기도없이는 단 한 걸음도 나아가지 않게 해달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내 삶에 아주 신실하게 이 기도를 이루어 가고 계신다. 늘 아무리 허우적대고 진땀을 흘려도 기도하지 않은 상태의 사역이든 삶이든 관계이든, 지나고 나면 단 한걸음도 나아가질 못했음을 발견하게 된다. 맥이 빠지는 일이지만, 그래도 참 감사하다. 그렇게 하시는 것이 주님이 날 사랑하신다는 증거니까.
기도없이 하는 일은 아무리 그 일이 효과적인 것처럼 보여도 결국은 가장 멀리 돌아가는 길일뿐이다.  이 세상에 기도를 통하는 것만큼 효과적이고 확실한 방법은 없다.
당신이 기도하지 못하는 이유가 혹시 분주함인가?  너무 바빠서 기도할 충분한 시간을 내기가 불가능한가?   그렇다면 그 분주함은 “죄”이다.  당신을 하나님으로부터 저만치 멀어지게 하는 우상이다.   교회 안에서, 여러 삶의 영역에서 감당해야 할 많은 책임이 있는가?  그 일이 당신을 하나님께로 더 가깝게 인도하는 것이라면 기쁨으로 헌신하라.  그렇지 않고 그 일로 인해 하나님께 가는 길이 막히고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게 된다면 어떤 불상사가 발생하고, 욕을 먹더라도 그 일을 내려놓는 것이 당신의 영혼을 살리는 길이다.

두 번째, 그들이 그곳에 없던 이유 중에 하나는 예수님에 대한 상실감이다.
[11] 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십자가에 죽으신 후 몰려온 그 엄청난 슬픔과 상실감에서 이제 다시 안도감을 찾았는데, 이제는 우리를 떠나지 않으시고 영원히 함께 하실 거라고 생각했던 예수님이 또 다시 그들을 떠나버리신 것이다.  언제 다시 오시겠다는 구체적인 기약도 없이...   그 상실감 속에서 그들은 예전에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했던 자신들의 초라한 모습만 남겨져 있다는 자괴감 속에 빠졌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무슨 능력이 있어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는 사람이 되겠어?  누가 내 말을 믿어주려고나 할까?  나같은 게 무슨....  (마치 부활하신 주님을 뵙고도 갈릴리 어부로 돌아갔던 베드로와 여섯 제자들처럼...)  나는 그런 삶을 살기에는 은사도 없고, 용기도 없고, 학식도 없고....  그래서 그들은 허탈감에 주님의 모습이 까마득히 하늘위로 멀어지고 난 후에도 한없이 그렇게 하늘만 쳐다보며 있었다.  이제 그들 홀로 남겨진 아쉬움과 두려움과 상실감 속에서...
그러나 주님은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기다려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이 성령의 임재를 통하여 그들과 함께 있음을 통해 그 상실감이 채워지기 위하여...  내 힘으로는 할 수 없기에, 성령을 통하여 믿음과 용기와 능력과 지혜를 공급받기 위하여....
당신은 당신의 삶 가운데 주님의 임재를 느끼며 살고 있는가?  시시로 그를 의지하며, 그분이 주시는 지혜와 은혜를 경험하며 살고 있는가?   아니면, 정반대의 고립감과 무력감 속에 살아가고 있는가?   상실감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하루 중 너무 많은 시간을 머리가 멍~한 상태에서, 아니면 우수에 잠기게 하는 이 가을로 인해 쓸데없는 잡념과 염려 속에서 보내고 있지는 않는가?  
“내가 세상 끝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이것은 주님의 약속이다.  이 약속이 우리에게 성취되고, 우리가 그것을 느끼고 인식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주님 앞에 머무르며 기다려야 하는 시간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다.

세 번째, 그들은 함께 있어야 할 필요성을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 기다리지 뭐.  근데 꼭 예루살렘에 같이 모여 있어야 할까?  그 좁디 좁은 다락방에 다들 모여 있어야 하는 이유가 뭐지?  어휴 그 복잡하고 시끄러운 곳에 난 같이 있는 것 만으로도 스트레스야~!  나 혼자 우리 집에서 기도하면 되지 뭐! 안 그래?  아, 예수님이 언제 그냥 기도하랬지, 같이 모여서 기도하라고 어디 써있기나 해? ”
14 下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
그러나 성경은 온 교회가 한 마음이 되어 전심으로 힘을 합해 기도할 때, 성령이 임했다고 말씀하고 있다.  간혹 혼자 산에서 기도하다 불 받았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체적으로 기름부으심은 공동체를 통하여서 오는 것이 일반적이다.   혼자서 집에서 묵상하면 더 깊이 할 수 있고, 개인적인 중보기도의 시간들을 잘 정해서 지켜오고 있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동체가 함께 모여서 예배하고 기도하는 시간들은 혼자서 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기름부으심과 은혜가 있다.  이것은 또한 강한 자가 연약한 자의 짐을 져야 할 책임이 있기 때문이며, 주님은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나도 그들 중에 있겠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함께 모이면 여러 가지 번거로운 문제들도 발생하고, 신경쓰지 않아도 되는 것에 신경써야 하고, 또 솔직히 별로 함께 있고 싶지 않은 그 사람이 그 곳에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성경은 모이기를 힘써야 한다고 말하며, 그것이 공동체의 기름부으심을 유지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방법이라고 가르친다.

위대한 사람이 되고 싶은가?  하나님 나라에 놀라운 영향을 미친 믿음의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은가?  우리의 삶의 영역에서도 위대한 업적을 남기는 사람이고 싶은가?    그렇다면, 당신이 머물러야 할 그 다락방의 자리를 지켜라.
그것은 처음의 일을 시작하는 어느 단계에서만 그래야 하는 것이 아니다.  사도들은 수 만명의 성도들이 예루살렘 교회를 이루게 된 때, 그래서 엄청난 사역의 부담 속에서도 “기도와 말씀에 전무”하는 것을 그들의 가장 큰 우선순위로 삼았다.   기도할 시간이 없을만큼 분주한가?  그것은 죄이다.  아무리 허우적대도 챗바퀴를 돌고 있는 다람쥐일 뿐이다.  분주함 속에서도 주님 앞에 머무는 시간을 확보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으로 사는 것이다.  그것이 가장 빠른 지름길이다.
하늘만 보고 있지 말라. 고립감과 무력감 속에서 한숨쉬지 말라.  주님은 지금 여기 우리와 함께 계신다.  나에게 말씀하시며, 나를 인도하시며, 새힘과 지혜를 주시는 분임을, 기다리며 기도하는 시간들을 통해 우리는 알게 될 것이다.
서로의 짐을 함께 나누어 지라.  혼자 끙끙거리지 말고, 누군가에게 마음과 삶을 열어놓고 다가가라.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찾으라.  그리고 그 사람의 손을 붙잡고 함께 기도해 주라.   이 공동체를 향한 주님의 마음과 비전이 무엇인지 알 수 있도록 구하라.  그리고 모여서 한 마음과 한 뜻을 품고 힘을 다해 기도하라.   주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도록, 이 몸 안에 은혜와 사랑이 넘치도록, 우리가 한 번도 맛보지 못한 부흥의 역사를 목도할 수 있도록....

잊혀진 다수가 되지 말라.   기억되는 소수가 되라.  
“하나님께로부터 위대한 것을 기대하라.  그리고 하나님을 위해 위대한 일을 시도하라.”
위대해지기 원하는가?  그렇다면 지금 곧 당신의 다락방으로 가라.
위로